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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끄적끄적

소설) 위험한 여행

by v아이네스v 2016. 6. 13.

제목 : 위험한 여행


작가 : 아이네스

메일주소 : eunppo@hanmail.net

티스토리 : http://eunppo.tistory.com/

 

 

못쓴 글이긴 하지만 불펌금지인거 아시죠?




****

제가 2003년도에 쓴 소설이네요.

창피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진 않지만

13년전에 내 열정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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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4일 금요일.




1년전 2003년 6월. 긴장마가 시작될 무렵.

나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두 번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은 여행이었다.

아주 위험했고, 너무 무서웠었다.

올해 42살이 되는 해 나는 나의 고향 친구들과 함께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일주일 정도의 기한을 잡고

지리산에 있는 친구인 박태경의 별장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2년 만에 떠나는 친구들과의 단체 여행이었다.

고교 졸업여행 이후 친구들과 이런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들떠 있었다.

최근 경기 불황으로 몇 몇 친구들은 직장을 잃어 일자리를 찾는 녀석들도 있었고,

몇 몇 친구들은 불황 속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녀석들고 있었다.

나도 지난달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후 여기 저기 이력서를 넣어 보기도 했지만

나와 같은 절둑발이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4살 때 소아 마비로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긴 하지만 생활하는데 큰 불폍같은건 전혀 없었다.

내 생각으론 그랬다.

하지만 주위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년전 잃어버린 나의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며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조금만 덜 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때 최초로 내 불편한 다리를 원망하게 되었었다.

어쨌든 난 덩그러니 내 몸둥이 하나만 가지고 지리산 태경이네 별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태경이는 자신이 하던 사업이 잘되어 몇 달전 지리산 자락에 낡은 별장을 구입해

내부수리를 다한 뒤 고향친구들을 전부 초대했기에 나도 빠질수 없었다.

조건이야 나에겐 금상첨화였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놀아주고...

그만한 곳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은 백수들에게는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난 출발 몇일전부터 기대가 되어 마누라에게 몇 번이고 자랑을 하고 다녔을 정도로

어서 빨리 그곳에서의 즐거움을 만끽 하고 싶었다.

마누라는 부부동반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간 섭섭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곳이 나의 어릴적 나의 친구들을 전부 죽음으로 내몰아 버리고

내 절룩발이까지 잘라내야 하는 끔찍한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허무하게 내 친구들의 죽음의 이유조차 알지도 못한채

허둥지둥 시간이 흘러 오늘 2004년 6월 4일.

드디어 그 별장을 찾아냈다는 전갈을 받아 급히 경찰서로 달려왔다.

그일이 일어 난지 정확하게 1년만이었다.



"조형사님! 그 별장을 찾았다는게 맞습니까?"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얼굴은 서너살 정도 형님같이 보이는 조만식형사를 보자마자

그 별장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네... 찾았습니다. 김상수씨."

조형사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실종된...

아니, 죽은 나의 친구들의 와이프들이 한 두명씩 경찰서로 도착했다.

그녀들은 흥분과 동시에 슬픈 얼굴은 한 채 강력반 사무실 안을 채웠다.

조형사는 일단 부인들이 전부 모이면 얘기를 하자며 자리를 피해 버렸다.

사무실 안은 나의 친누나인 상미누나외에 7명의 여인들이 모였다.

벌써 몇 번째의 만남인지 모른다.

사실 너무 어색한 만남이었다.

난 그녀들을 볼때마다 내가 죄인이 되어버린 듯 했다.

나 혼자만 살아남았기에 어쩔수 없이 짊어 지고 살아야할 짐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들을 보때마다 목이 매어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녀들도 나의 마음을 아는지...

아니면 이미 그녀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남편들의 빈자리가 조금씩 지워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잠시후. 조형사는 뚱보 강춘복 형사와 함께 강력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들의 와이프들과 나는 숨을 죽인채 그 둘중 누구하나가 입을 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온 몸 마디마디가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둘은 한참동안을 서로 무슨 얘기를 속삭이다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강형사가 사무실 안에있는

넓은 탁자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 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가 앉은 탁자 주변으로 모여 앉았다.

"지리산 근처에서 우리가 찾고 있던 별장을 찾았습니다.

그 별장은 김상수씨의 증언대로 화재로 인해 거의 손실되어 있어 그 형태를 전혀 볼수 없을 정도였으며

어렵게 추적해 본 결과 이 별장이 확실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여러 장의 사진 중 현재의 별장모습이 찍힌 사진을 우리들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지석의 와이프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너진 별장 속에서 8구의 유골을 발견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몇구의 시신상태가 많이 안좋았으며 현재 유골 8구 모두 국과수에 의뢰를 맞겨놓은 상태입니다."

강형사는 식은 땀을 닦으며 여러장의 사진들을 나란히 탁자위에 정열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5구의 유골은 나란히 똑바로누워있었고, 한구는 엎드린채, 나머지 두구는 서로 겹쳐있었습니다."

"형사님. 유골이 9구가 아니라 8구가 확실합니까?"

나는 강형사가 내민 사진들을 천천히 살펴보았지만 분명 9구가 아닌 8구의 유골만 존재했다.

"상수씨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분명 8구입니다.

화재로 인해 상당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유관으로도 식별 할 수 있듯이 분명 8구가 확실합니다."

"그럼...."

"그건 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유골을 옮겼거나, 아니면 스스로 옮겼겠죠."

강형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무너진 건물 지하에서요?"

상미누나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일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그 한명이 친구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단말인가? 그럼 그 놈은 누구라는 거지?'

연신 한숨만 나왔다. 머리가 지끈 거리고 아파왔다. 눈앞이 어지러워 바로 서있기 조차 힘이 들었다.

"일주일 후쯤이면 국과수에 의뢰한 신원확인서가 나올것입니다.

연락이 오는데로 바로 연락을 취할테니 오늘은 집에 돌아가셔서 연락은 기다리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강형사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조형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린 아무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듯 하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난 중간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일주일이라...'


어서빨리 일주일이 오길 바랄뿐이었다.

 

 

2003년 6월 23일 월요일 D-DAY

이른아침부터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난 긴 여행 준비를 아주 간소하게 했다.

일단 등산화 한 켤레와 속옷과 여벌옷 각각 세벌, 그리고 운동화 한 켤레, 수건두장,

그리고 상비약(잔병은 없는 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 상비약을 많이 준비했다.)을 챙겼다.

마누라는 멀리떠나는 날 바라보며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겠어요?"

나와 같이 소아마비로 왼쪽다리를 전혀 쓰지 못해 끌고 다니는 마누라는 비가 많이 온다며 아까부터 계속

야단법석이었다.

시무룩하게 날 바라보는 마누라에 비해 난 싱글벙글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당신이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개꿈이야. 너무 신경쓰지마."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평소와 사뭇 달라보이는 그녀의 모습에도 아랑곳 없이 난 배낭을 매고 집밖으로 나왔다.

"너무 걱정하지말고 당신도 친구들이랑 여행이라도 다녀와."

내 뒤를 따라오는 마누라에게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때 날 기차역까지 데려다줄 택시가 내 눈앞까지 나와 있었다.

난 마누라의 볼에 입을 마춘 뒤 서둘러 택시안으로 몸을 실었다.

마누라는 연신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웃으며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택시는 어느덧 기차역까지 쌩~ 하고 달려왔다.

기차역안에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야~! 쌀집아들~!!"

내 뒤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양계장 둘째 아들 강현일이었다.

"쌀집. 잘지내냐?"

"닭집도 잘지내냐?"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 인사했다.

"요즘 닭고기를 못 먹었더니 자꾸 니 생각이 나서 죽겠다."

현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손에 든 큼직한 가방을 내밀며 씨~익 하고 웃었다.

"이거 다 닭이냐?"

"당근이지."

"몇 마리냐?"

"한... 스무마리 정도 될꺼야."

"그러다 니네 양계장 거덜나는거 아니냐?"

"하하하. 이거다 폐계야. 상품이 아니란 말이지. 이런거 백마리라도 가지고 올 수 있어."

"혹시 이거 못먹는거 아냐?"

"무슨 소리! 먹어도 괜찮아. 수탉들은 자기들끼리 영역싸움을 잘하는데 그때 다친닭들을 잡은거야."

그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닭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설명한다음 다른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나를 몰고 갔다.

"얘들아~ 오랜만이다!"

현일이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방에 있는 친구들 빼고 전부 6명이 기차역으로 모였다.

매일 보던 친구들도 있었고, 오랜만에 본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열심히 현일의 뒤를 따라갔다.

"어이~ 닭집! 쌀집! 잘 있었냐?"

현일과는 달리 고등학교 졸업한 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정종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조폭!"

현일의 갑작스런 대답에 나는 약간 움찔했다.

예전부터 종일이가 주먹 세계에 들어 갔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진짜로 종일의 모습을 보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겉 모습만 봐도 척하면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나 나는 야유회 분위기로 챙이 넓은 모자와 가벼운 의상(반바지와 반팔티)을 입고

발에는 시원하고 편한 센들을 신고 있었으나

종일은 검은색 정장에 검은 선그라스, 검은색 구두, 거기다 가방도 검은색이었다.

그에게서 하얀 것을 애써 찾는다면 와이셔츠와 그의 치아뿐일 것이다.

원래 검은 얼굴이었지만 검은색 옷까지 입으니 더욱 검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종일과 친했던 현일은 그에게 서슴없이 '조폭'이란 말까지 내 뱉었다.

하지만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인가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현일은 어느새 종일의 옆에 있었고 나는 조금씩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김상수. 잘 있었냐?"

종일과 현일이 옆에 쪼구려 앉아있던 강민철이 나를 보며 손짓했다.

"너도 알다시피 그냥 그렇다. 상미누나는 잘 있냐?"

민철은 나의 친 누나인 상미누나의 두 번째 남편이다.

나에게 매형인샘인데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기에 그냥 편하게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내고 있다.

"넌 만나면 상미누나만 찾더라. 난 눈에 안보이냐?"

"그래. 넌 잘 지내냐?"

"빨리도 물어본다. 너도 알다시피 짭새가 어디 잘 지내는 직업이냐?"

민철은 웃으며 내게 옆자리에 앉으라며 권했고 나도 마침 다리가 조금 피곤한 상태였기에

바로 그의 옆자리에 배낭을 풀고 앉았다.

"그래도 얼마전에 승진했다며? 축하한다."

난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그건 우리 친구들끼리의 습관이라고 해야할까?

암튼 우리는 자주 친구의 어깨를 치며 서로의 친밀감을 나타내곤 했다.

"넌 짤렸다며? 축하한다."

"나에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냐?"

민철은 놀리는 듯이 날 바라보았지만 난 시무룩해져가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

내가 고개를 떨군채 말했다.

"짜식. 뭐가 걱정이냐? 너도 니네형처럼 아버지 뒤를 이어 쌀집하면 되잖아.

요즘 가업이어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 나고 있는거 너도 잘 알잖아."

그도 내 어깰 두드리며 기운내라는 말로 위로했다.

"근데, 상수야. 태경이는 뭐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다 모았다냐?"

민철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사채 하잖아."

민철은 인상을 구기며 날 바라보았다.

"어쩐지... 왠지 캥기는게 있더라."

"캥기는거? 그게 뭔데?"

"요즘같은 불경기에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많이 벌겠냐?

돈놀이 아니면 우리같은 빽도 없고, 학벌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돈 벌기 힘들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악덕 사채업자들이 많다는데 태경이도 그런 축에 들어가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렸을 적부터 꼼꼼한 성격이라서 돈받는건 잘 챙길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데 옆에서 민철이 옆에서 이유도 모르게 계속 킥킥 거리는 것이었다.

"너 그렇게 웃으니깐 토 나올라 그런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난 언제나 밝게 웃는 민철이 좋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성격도 밝고, 곱상하게 생겨 여자들에게는 물론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의 어머니께서 그때 당시 상당한 미녀였다.

아마 어머니의 피를 물려 받은 것 같았다.

"다들 모였구나. 자. 기차가 온 것 같으니 올라타자."

늦게 도착한 태경이가 우리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우리들을 리드했다.

우리는 자신들의 짐을 챙긴 뒤 기차위로 올라 짐을 챙긴 뒤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기 바빴다.





어느덧 우리가 오른기차가 우리가 내릴 남원역에 도착했다.

우릴 남원역에서 지리산에 있는 태경이의 별장까지 데려다줄 차 두 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산길을 오랜시간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태경은 특별히 신경쓴 듯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머지 친구들 넷과 합친 후 두 대의 차에 반반씩 나누어 탔다.

"늘씬한 여자들은 있냐?"

차에 올라타자 마자 오랜만에 보는 현유찬이 태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유찬. 넌 여자 없이는 못사냐?"

구멍가게 아들 유찬이가 태경이에게 투덜거렸다.

"뭐니뭐니 해도 여자가 있어야 노는 재미가 나는거야. 술도 따라주고, 춤도추고... 그리고... 크크크"

"미안한데 여자는 없다."

유찬은 아쉬운 듯 태경을 바라보았다.

유찬, 태경, 나는 뒷자석에 앉았고 앞자석에는 오랜만에 보는 원경선과, 김지환이 앉아있었다.

나는 일단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는 지환이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지환아. 넌 뭐하면서 지내냐?"

"그냥."

지환은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창밖만 바라보았다.

무안해진 나는 어쩔 수 없이 지환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경선이에게 말을 걸었다.

"경선아. 잘 지냈냐?"

"어."

경선이는 매우 피곤해 보이는 듯 꾸벅꾸벅 졸면서 대강 대답했다.

요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경선이와 지환이 만큼은 달랐다.

경선이는 아버지께선 경선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 가셨지만

아버지께 재산이 많아 그것을 전부 경선이가 물려받았고,

어머니께서도 부지런해서 그 돈을 많이 불려 놓아 어려울 것이 전혀 없는 그였다.

그도 사업수완이 좋아 동남아는 물론 유럽에까지 진출해 있는 휴대폰 부품 생산업자였다.

어렸을 적에만 해도 우유부단하고 줏대없이 행동하던 그가 무슨 이유 여선지 어느순간부터 고집하면

끝까지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첫사랑에게 차여서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런말을 전혀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친구들도 그 얘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건 여자때문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가 일주일간 지낼 별장에 도착했다.

많은 시간은 덜컹거리는 차안에 있었더니 다들 멀미를 어지간히 하는 모양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시간감각이 없는 나는 몇시간을 기차를 타고 몇시간을 차를 타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3시나 4시정도 된거 같았다.

아무도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멀미로 오바이트를 했어도 그누구도 배고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실컷 먹고 마시자는 생각일 것이다.

나역시 약간의 허기를 느꼈지만 조금 있을 근사한 저녁시간을 기대하며 참았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어느새 개었고 햇살이 머리위에서 살짝 비추기 시작했다.

우린 각자 2층에 있는 개인 침실을 배정 받은 후 짐을 풀었다.

난 짐이 별로 없었기에 짧은 시간에 짐을 정리 한 뒤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내가 쓰는 방은 꼭 여관방 같았다.

태경이 말로는 예전에 여기가 산장으로 쓰였다가 자신이 약간의 개조와 보수를 했다고 했지만

원래 건물용도가 숙박용이라 그런지 여관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은 깨끗했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방은 동쪽 방향으로 큰 창문이 하나 있었고, 방 입구는 반대 편이었다.

입구에서 창가쪽으로 보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나무들 때문에 창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현관에서 바로 왼쪽은 화장실 겸 욕실인데 세면도구와 면도기, 수건들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태경이니 어지간히 해 놓았겠어' 난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침대는 머리맡이 창가와 닿아있었고, 세로로 길게 퀸 싸이즈 크기의 배드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아래쪽으로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널직한 쇼파와 작은 탁자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고,

침대 반대편에는 옷장과 화장대, TV, 전화기, VTR, 오디오까지 잘 세팅되어 있었다.

창가에는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 커튼이 달려있었다.

방 전체가 하늘색 톤이라 왠지 나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으로 그 방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 방을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보니 태경이가 내 방문에 방패를 하나 달아주며 웃었다.

"넌 1번 쌀집이다."

태경은 씩 웃으며 내 방문에 방패를 붙였다.


< 방배정표>

1번 쌀집 - 김 상 수

2번 하나님 - 이 지 석

3번 이장님 - 박 태 경

4번 최의원 - 최 재 훈

5번 이뿐이네 - 강 민 철

6번 과부집 - 원 경 선

7번 과수원집 - 김 지 환

8번 덩치 - 정 종 일

9번 닭집 - 강 현 일

10번 구멍가게 - 현 유 찬




내 방과 마주보고 있는 방에는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지석의 방이었다.

그의 방페에는 '2번 하나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의 부모님 때부터 교회에 다니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절반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나머니 절반은 아버지와 예수님이겠지...

"똑똑똑"

난 그의 방 앞에서 노크를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는 지석은 날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처다보았다.

"짐 정리 벌써 끝났어?"

"응. 준비해 온 게 별로 없었거든...^^;"

"그렇구나. 난 아직 짐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들어올래?"

"아니, 괜찮아."

난 지석의 권유에 정중히 거절을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지석의 방 역시 하늘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짐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별장은 전체적으로 동향이었고, 위로 2층, 지하 1층 총 3층짜리 건물이었다.

겉은 통나무집 같은 분위기가 났지만 실내는 깔끔한 서양식 분위기였다.

일단 나는 1층을 둘러보았다.

1층 거실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벽란로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주방, 왼쪽에는 커다란 술진열장 및 작은 바가 잘 차려져 있었다.

벽란로 오른쪽에는 땔감들이 가득 했었고, 왼편에는 낡은 TV가 놓여져 있었다.

1층을 대충 둘러보고 주방 옆으로 난 계단을 이용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음식 창고와 같았다.

넓은 지하실 한쪽 벽에는 거대한 냉장, 냉동고가 각각 세대씩 여섯 대가 돌아가고 있었고,

거긴 각종 야채와 고기, 생선들이 가득차 있었다.

한켠에는 여름이라 돌아가지 않는 보일러 실과, 태양렬 에너지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동력실이 있었다.

지하실을 돌아본 뒤 밖으로 나오는 계단을 이용해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태경이가 눈에 보였다.

태경이는 부지런히 땔감들을 정리고 있었다.

"뭐하냐?"

"오랜만에 캠프화이어 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근데 여긴 왜 나무들이 다 짤렸냐?"

"당연히 캠프화이어 하기 위해선 넓은 공간이 필요하잖아. 산불이라도 나면 큰일 나잖아.

그리고 벽란로에 사용할겸 해서 다 잘라냈지."

"그렇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준비까지 철저하게 잘 되어 있어 여간 놀라지 않았다.

원래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인 태경이가 이점도 쯤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듯 여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혼자 캠프화이어를 준비하는 태경이를 위해 식사준비를 자청했다.

그때 2층에서 내려오는 최재훈이 보였다.

"뭐하냐?"

"태경이가 캠프화이어 준비한다길래 도와 줄려고. 내가 딴건 몰라도 밥하난 잘 하잖아."

난 농담으로 꺼낸말을 재훈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만 웃고 나좀 도와죠."

일단 난 지하에 내려가서 야채와 고기들을 꺼내왔다.

재훈은 잘 정리된 주방 여기저기를 살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집 보다 더 좋다. 먹을 것도 많고, 정리도 잘 되어 있는데..."

"태경이가 원래 꼼꼼하잖아."

재훈이 내 말에 동감을 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은 얼굴이며 옷에 온갖 음식물들을 다 튀어가며 음식을 했다.

준비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 우린 주방 가득히 이것저것을 쌓아 놓으며 서로 잘하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재훈은 2 년전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 대신 아들 한명과 단 둘이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음식 솜씨는 프로급이었다.

특히 그의 파전과 김치전은 정말 일미였다.

우리가 어느새 히히덕 거리며 음식이 거의 준비되어 있었다.

짐정리가 끝낸 친구들도 하나 둘씩 나와 자기가 할 일을 찾아가며 도왔다.

우린 밖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모닥불 아래서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 나가기 시작했다.


 


2003년 6월 30일 월요일 D+7


즐거웠던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놀고 먹으면서 지낸 시간이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니 빗방울이 더욱 굵어져 있었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야 하는 데 굵어진 빗 방울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폭우속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다 전화가 불통이 되어 버렸고,

휴대폰은 깊은 산중이라 수신이 잘 잡히지 않아 무형지물이나 다름 없었다.

원래 어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자유롭고, 풍요롭게 놀아본적 없었던 우리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오늘 새벽에 출발하기로 약속 했었다.

그러나 오전 8시가 넘은 지금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우리 머리위에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내려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태경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차가 늦은걸 보니 산 아래는 물이 불어나 올라오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럼 우리 못 돌아가는 거야?"

현일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길이 막히면 못 올라올꺼야."

태경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일은 더욱 어두워진 눈빛으로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 비는 언제쯤 그칠까?"

"TV를 보니 일주일 정도 내린데. 오늘부터 장마란다. 근데 TV도 잘 안나온다."

내가 TV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현일은 연신 한 숨만 쉬었다.

우린 아무말 없이 벽난로 주위에 주저 앉았다.

서로 오늘, 내일 할 일과 가족들의 안부들을 걱정했다.

"난 말야.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어."

유찬이가 술 진열장 옆에서 양주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난 결혼 같은건 해 본적도 없이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소매치기 하며 살다가 큰 집 몇 번 다녀오고,

노숙자로도 살아보고. 그러나 우연히 길에서 태경이를 만난 후 태경이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지.

난... 지금 너무 후회가 되.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바보같이 살았어. 마누라도, 자식도 없이... 그냥 이 술과 벗하면서 살고 있는 내가 너무 힘들어...."

그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태경을 바라보았다.

"태경아, 고맙다."

태경은 아무말 없이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유찬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강민철 이자식! 넌 친구라는 놈이 날 깜빵에 가둬?

씨발! 니가 짭새면 다냐? 경찰이면 다냐고! 겨우 서자 주제에..."

그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민철을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현유찬. 넌 죄값을 받은거야."

민철은 조용히 말했다.

"씨발! 니가 그렇게 잘났냐? 니가 그렇게 잘났어?

씨발 너같은 새끼 때문에 정희가 불타 죽은거아냐!

니가 불러내서 너 때문에 죽었어! 씨발놈아!"

"시끄러 이자식아! 거기서 정희 얘기는 왜 꺼내는 거냐! 미친새끼.

왜 정희가 나땜에 죽었냐? 난 아무것도 한거 없어. 솔직히 니가 그런거 아니었냐?"

"뭐 이새꺄!"

유찬은 분개하며 민철의 멱살의 잡았지만 곧 손을 놓아버렸다. 그 이유는 태경이 그를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라."

조용히 앉아 있던 종일이 입을 무거운 목소리로 유찬과 민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주일 내내 검은 양복만 입고 다니면서도 친구들에게는 최대한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 하던 그가

갑자기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하니 나는 여간 놀라지 않았다.

유찬과 민철은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레 20년전에 죽은, 아니 그보다 훨씬전에 죽은 윤정희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나 역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자연스레 고개가 떨구어 졌다.

유찬도 아차 했는지 입을 다문채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희는 작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윤사장님네 외동딸 이었다.

윤사장님은 읍내에서 큰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의류점까지 운영했었다.

정희는 우리동네 남자들이 모두 좋아할 만큼 예쁘고, 착하고, 똑똑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런 사고에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그건 정말 사고였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우린 지금까지 혹시 누가 불을 지른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약인 듯 지금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연신 '하나님'을 중얼거리던 지석은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예전부터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터라 그는 주기적으로 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 지석이 지금 많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비가 언제까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산속에 어떻게 지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괜찮을꺼야. 너무 걱정하지마."

지석의 옆에 있던 현일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토닥였다.

현일을 일그러져 있는 지석의 기분을 좋게 하지위해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역시 불안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저 놀러와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곧 집에 돌아갈꺼라는 나만의 암시를 걸면서도 난 불안했다.

그때 문득 지리산에 오기전 마누라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어젯밤 꿈에 당신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그저 개꿈이라고만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마누라의 그 한마디가 갑자기 내 몸 속에서

더 큰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자며 애써 넘겨보려 했지만 자꾸 그 말이 메아리 쳤다.

너무 불안했다.

지금도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빗소리가 마누라가 했던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불이 아니라 물속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우리 이렇게 모여서 술만 마셔대기만 했지 서로 마음속에 있는 말들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거 같아.

우리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나, 서운했던 말을 꺼내 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진실게임이라고 해야겠지?"

한참동안의 침묵을 깬 건 종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서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현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종일과 제일 친한 현일이 종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닭똥 냄새 맡으며 살아왔어. 지금 역시 그렇고, 난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어.

당연히 공부도 못했고, 운동도 못했어.

그래서 닭 키우는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지

하지만 애들은 나에게서 닭 털냄새, 닭 똥 냄새가 난다며 날 놀려댔어.

그래서 혼자 많이 울기도 하고, 학교도 빼먹기도 했어.

난 닭이 좋았어.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봐.

먹을때만 좋아했지 키울땐 싫어한다는 걸 뒤 늦게서야 깨달았어.

그런 나에게 종일이는 어른스러워 보였어.

종일이를 낳은 후 산후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보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그는 언제나 당당하고 멋있는 남자였어. 나에게는 우상이었지.

그래서 난 언제가부터 종일을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됐어.

지금 이렇게 말야.... 하하하 그리고....

정희는 내겐 천사와 같았어. 우리집 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데.

난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했복했는지..."

현일은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상상하며 즐거워 하다가 갑자기 정희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무룩 해졌다.

그도 알게 모르게 정희를 좋아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명랑했던 그가 그토록 숨기도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또래 아이들이 모두 정희를 좋아했고, 언제나 정희 주위에는 자신보다 멋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보잘 것 없고, 얼굴도 못 생긴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정희를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녀를 무척 좋아했기에....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그녀 곁에 있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나 역시 그랬으니깐....

나도... 현일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하고 싶었다.

"난.... 얼마전 회사에서 짤렸어. 그래서 지금은 비둥거리며 놀고 있어.

아버지와 형과 함께 쌀 장사나 해볼까 생각 중이야."

난 잠시 침묵을 지키다 크게 한숨을 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현일이 말대로 정희는 천사였어. 그애는 내 다리를 보며 비웃지도, 장난하지도, 놀려대지도 않았으니깐.

그 애는 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 줬어.

그게 내가 제일 바라고 있던 것 중 하나였거든.

장애인이라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삐쩍 마른 내 오른쪽 다리를 보며 서로들 수근 거리고,

일부러 그런 시선을 피하며 다니기도 했지만 나도 사람이기에 화도 나고 울기도 많이 했지.

그런 나에게 정희의 그런 마음이 큰 용기를 줬어.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거야. 소심하고, 용기없는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거든."

나는 갑자기 집에 있는 마누라가 생각이 났다. 그러자 얼굴이 빨개 졌다.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마누라와 아들, 딸이 걱정되었다.

친구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 일 것 이다.

"난..."

지석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언제나 불안했어..... 내.... 죄 때문에... 벌을 받을까봐... 그래서 매일 같이 고해했어...

어렸을땐 많은 동생 돌보느라 수없이 지각, 조퇴, 결석을 하던 나에게 공부란 정말 힘이 들었어.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했던 부모님께는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분이야.

나 역시 그렇고. 나와 짝이었던 유찬이 녀석을 내가 학교에 왔는지 말았는지 조차 관심 없었는데

정희는 내 노트필기까지 대신해서 우리집까지 가져다 주었던 유일한 친구였어.

현일이 말대로 그녀는 천사인게 분명해."

지석이 역시 20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정희의 얘기를 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절대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악몽은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친구들과도 같을 것이다.

한 동네에 살았고, 고등학교 까지 함께 다녔고 같이 졸업했다.

작은 마을이라 학생수도 많지 않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친구들이었다.

지석이는 그때일이 다시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흘렸다.

"난... 우리집 구멍가게 다 말아먹고 부모님들까지 죽인 불효자야."

유찬의 한마디에 친구들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내가 정희 좋아했다는거 너희들 다 알꺼야. 너희들 역시 정희 좋아했다는것도 알고 있고.

근데.... 정희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나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는 철저한 무관심을 보였지. 그게 왠지 알아? 아무도 모를꺼야.

사실... 내가 정희 친구를 건드려 임신 시켰거든. 그것도 고1때 말야. 결국 그애는 목을 맸지.

정희는 그때부터 날 싫어했어. 날 아주 벌레취급을 했었어.

사실... 누구든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전부 그랬을 꺼야. 다행히 그 사실은 정희와 나밖에 몰라. 케케케"

그의 눈은 울면서 입으로는 웃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많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벌레취급하면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정신나간 여자애 말하는 거냐?"

재훈이 조용히 물었다.

"아니. 그애는 야냐. 내가 왜 그런애를 건들겠냐? 이래뵈도 난 그 정도까지 악질은 아니라고.

우리 옆 동네 사는 키 쪼그만하고 엄마가 술집하는 집 딸이야.

그래 이름이... 뭐더라... 순자였던가.... 선자였던가.... 암튼 그랬어.

한밤중에 우리 동네에서 그 애를 만났는데. 그 애가 야심한 밤에 뭐하러 먼 우리동네까지 온줄 알아?

기생오래비 민철이를 만나려 왔단다. 그 애가 나에게 민철을 불러달라며 쪽지를 건네줬는데

내용인 즉 야심한 밤에 마을에서 떨어진 오두막집에서 보자는 것이었지.

몸매는 별로였는데 얼굴은 디게 이쁘게 생겼더라구.

내가 그걸 미쳤게 민철이 갔다줬겠냐? 그냥 내가 꿀꺽 먹어버렸지.

이년이 내가 민철인 줄 알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결국 내가 민철이가 아닌 것을 알고 엄청 열내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다보니 임신까지 하게 되고....

자살까지 해버리더라...."

자책감이 들었는지 유찬은 고개를 떨군 채 어두워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어렸다면 어렸었던 나이에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은 아이를 갖게 된 여자아이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은 그애를 생각하니 괜히 한숨이 나왔다.


 



"난 정희는 별로였어. 솔직히 너무 잘났거든."

종일이 갑자기 침묵을 깨고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크기도 하지만 아까의 종일의 행동 때문에 모두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난 정희는 나에게 그림의 떡이었어. 난 내 분수를 잘 알거든.

그래서 난 그런 꿈은 꾸지도 않았어. 그런 생각만 하면 난 너무 초라해 지거든.

난 지금 내 아내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나같은 건달을 사랑해주고, 믿어주니깐.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야 행복한거란걸 다들 알꺼야.

욕심이 너무 크면 그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하거든."

그는 자신이 너무 초라했기에 정희를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접어야 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 정희의 얘기만 나오자 나는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 우리들의 말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혼령이된 정희가 우리를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우리들에겐 정희 말고는 공통의 대화 소재는 없었다.

"나도 정희... 좋아했는데...."

지리산에 온 뒤 혼자서만 술을 마시던 경선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말이 없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의 침묵은 오래갔다.

"그래...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 정희에게 차였어.... 너무 줏대가 없다며...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다고 했어..."

경선이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안아도 우린 경선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경선이의 말에 동의를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지 그 사실은 장본인에게 들으니 왠지 개운하지 않았다.

"난, 정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갑자기 민철이 똑부러지는 말투로 소리쳤다.

"난, 정희보다는 상수네 누나인 상미누나를 좋아했어."

"그런 거짓말 집어쳐! 재수없어!"

유찬이 민철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소리쳤다.

민철은 불쾌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짜야."

"재수업는 소리 계속 지껄릴래? 졸라 재수없네."

유찬은 계속 민철을 쏘아 부쳤다.

"민철이 말이 사실이야. 민철이가 매일 우리집 대문앞에 편지를 놓고 가는 거 봤어.

그것도 아무도 일어 나지 않는 꼭두 새벽에 말이야.

내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한 5년 정도 매일 같이 놓고 갔어.

우리 누나도 민철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강요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정혼자와 결혼 한거야.

누나도 속으로는 매일같이 자신을 위해 편지를 쓰고 가져다 주는 민철에게 동생으로써가 아닌

남자로써 좋아했지만 누나는 자신의 마음 내비치지 않은채 그냥 결혼하게 된거야.

결혼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민철이가 사라지리라 생각했어.

근데, 상미누나와 매형사이엔 5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어.

당연히 매형쪽 집안에서는 아이가 없는것은 누나쪽이라 생각하겠지.

그래서 거의 쫒겨나다 싶이 해서 이혼을 당한 후 고향으로 내려온 누나를 민철이가 받아준거야.

누가 나이도 많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겠어?

하지만 민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마음이었어.

지금은 아이도 셋이나 낳고 잘살고 있잖아. 전 매형이 불임이었지, 우리 누난 아무 문제가 없었거든.

우리누나와 민철이가 결혼한걸 숨긴건 정말 미안해.

다들 민철이가 바빠서 연상의 여자와 혼인 신고만 하고 같이 산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게 우리누나였는지는 아무도 몰랐을꺼야.

지금도 민철이에게 너무 고마워. 비록 매형이긴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겐 소중한 친구거든."

나는 민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민철이도 귀여운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쳇! 잘난 척 하긴. 니가 그럴수록 더 재수 없어."

유찬이는 계속 민철을 보며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우려 주지 않자 화가난 유찬은 술진열장에 가서 양주한병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유찬이가 혼자 술을 마셔도 원래 혼자 자주 술을 마시니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렸다.

한참동안 정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장님의 외손자인 태경이는 미혼모로 자신을 낳다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의 품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는 자신에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뿐이었지만 그 두분은 연세가 많으셔서 태경이가 스무살도 되기전에 둘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태경은 미혼모 보호시설과 양로원이나 요양기관에 많은 기부금을 내고 있지만

사채업자가 그런 좋은 일을 한다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말을 덧 붙였다.

과수원집 둘째아들인 지환이는 아버지가 하시던 과수원 일부를 물려받은 뒤 그것을 팔아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지금에서야 겨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게임회사를 차린 뒤

요즘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 프로그래머 및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언제나 혼자있기를 좋아했던 그에게는 게임이 전부였으며 자신은 게임이 엇었다면 지금쯤 낙오자가 되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고 했다.

최의원의 외아들인 재훈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학과 선배와 동업으로 건축설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라이벌겸 동업자로 선배와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했지만 2년전 죽은 아내 얘기가 나오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힘들게 눈물을 멈춘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정희가 불행히 우리 병원에서 사고가 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한 마음 뿐이다."

갑자기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 났는지 재훈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소리없이 흐느꼈다.

정희가 불이 난 병원 속에서 비명의 지르던 소리가 아직까지 나의 귓가에 생생하다.

아무도 그 불길 속에 뛰어들지 않았던 상황에서 재훈의 부모님께서는 온 몸에 물을 끼얹인 후

병원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노후된 병원은 금새 무너져 버렸기에 그들은 병원안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에 모두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불길을 다 잡은 후 시신을 찾아 보았지만 너무 끔찍하게 타버린 세구의 시신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녹아 뼈가 앙상하게 보였으며 탄 냄새가 진동했다.

하나 밖에 없는 재훈이 조차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했을 만큼 심하게 손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집, 병원,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은 재훈은 이젠 아내까지 잃었다.

지금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까?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의지 할 곳 하나 없는 그에게 객지 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켁! 켁! 켁!"

술진열장에서 유찬의 탁한 기침소리가 들린 것은 나와 민철이 화장실을 가기위해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저 새끼는 왜 저기가서 술쳐먹고 지랄이야."

민철이 투덜거리며 유찬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야! 너 왜이래? 야! 현우찬! 정신차려 이새꺄!"

갑자기 민철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린 반사적으로 민철과 유찬이 있는 술진열장 쪽으로 갔다.

유찬은 많은 술병속에서 나 뒹굴고 있었고 민철은 그를 부축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야! 현유찬."

그때 태경이 유찬의 얼굴을 살펴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자식..... 왜 이래.... 왜... 숨을 안 쉬는 거야....."

새파래진 유찬의 얼굴을 본 지환이 뒷걸음질을 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래?"

민철이는 믿기지 않는 듯 유찬의 얼굴을 살펴보며 그의 입과 코에 손을 대 보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손은 점점 차가워 졌고, 동공은 풀려있었다.

그는 죽어버린 것이었다.

"진짜..... 진짜로..... 진짜.... 죽었어.... 유찬이가..... 죽었어....."

바로 몇 분전, 아니 바로 몇 초전 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그였는데 모두들 믿겨지지 않았다.

유찬의 얼굴은 정말 끔찍했다.

모두들 유찬의 시체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석은 미친 듯이 연신 하나님만 찾고 있었고, 태경은 이미 식어버린 시체를 보며 통곡을 했다.

아무리 철이 없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친구라고 할지라도 태경에게 있어선 그는 아직까지 친구였고,

부하직원이었다.

죽어버린 유찬을 바라보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안는 듯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으악~~!!"

갑자기 지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듯이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심장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친구가 죽었기 때문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재훈과 경선이 지석은 말리며 위로 해주었지만 그들 역시 맘이 편하지 못했다.

"일단 2층으로 옮기자. 언제까지 여기에 놔 둘순 없잖아."

태경이 울음을 멈추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 새끼! 맨날 술 처먹고 다니니깐 술 때문에 디질줄 알았어!"

민철은 애써 눈물을 감추며 소리쳤다.

그는 목이 매여 재대로 말을 할 수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라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난 그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았다.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잠시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은 피곤해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그건 나만의 상상이었다.


 


2004년 7월 1일 화요일 D+8 (사망자 : 10번 현유찬)


밖에는 아직까지 굵은 빗줄기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유찬의 시신은 유찬의 방의 침대위에 눕혀져 있었다.

우리의 바로 옆방에 유찬의 시신이 있다는 생각에 아무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식량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6개의 냉장고 중에 단 하나만 음식이 채워져 있었고 나머진 전부 비워진 상태였다.

태경은 일주일 치 식량만 준비했을 뿐 그 이상의 식량을 준비하지 않았가고 말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자책을 했지만 그건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했다.

"니 잘못이 아냐. 더 놀고 자자던 우리들의 잘못이지.

앞으로 비가 더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은 식량들은 아껴서 먹자."

지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그가 입은 연다는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어제 자신의 속마음을 털오놓고 난 뒤부터 그의 낯빛이 전보다 밝아 보였긴 했다.

"근데.... 유찬이를 다른데 옮겼으면 하는데.... 괜찮겠니?"

현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시체가 내 옆 방에서 자고 있다는게 왠지 기분이 나빠."

종일이 현일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조폭은 시체들 자주 봤을 텐데 왜 그러시나..."

민철이 비아냥거리며 종일의 말에 토를 달았다.

"짜증나게 하네 진짜!"

종일이 민철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지하로 옮기자."

종일과 민철의 신경전이 계속 될 것 같아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음식이 있는 냉장고 하나는 1층으로 옮겨 놓으면 지하실로 내려갈일이 없을꺼야."

태경이 내 의견에 말을 덧 붙였다.

"일단 지하실에 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을 1층으로 옮기고

냉장고를 옮긴 뒤 유찬이를 지하실로 옮겨놓은 다음 나중에 비가 그치면 옮겨 놓자."

모두들 태경이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일단 냉장고를 지하실에서 꺼내오는 일이 먼저였다.

지환이와 지석이는 안에 있는 걸 모두 빼놓은 뒤 1층으로 옮겨놓고, 경선, 재훈, 민철, 종일이는

냉장고를 지하실에서 1층으로 옮겨 온 뒤 유찬이를 지하실로 옮기는게 마지막이었다.

태경이와 현일이와 내가 유찬의 방문 앞에 섰다.

'10번 구멍가게 현유찬'라고 쓰여진 방패가 보였다.

"왠지 오싹하지 않니?"

현일은 날 바라보며 물었다. 현일이 무섭다며 억지로 날 앞으로 밀어 붙였다.

"왜 이래?"

나는 뒤로 물러서며 태경이 쪽으로 몸을 옮겼다.

"너희들도 무섭니?"

현일의 물음에 우리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일이 용기내어 방문을 열자 방안은 술냄새로 진동했다.

"토 나올 것 같아."

난 코와 입을 막으며 말했다.

현일이와 태경이도 울렁 거리는 속을 참으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랄하지말고 빨리 들어와서 옮겨."

현일이가 짜증난다는 듯 나에게 소리쳤다. 솔직히 나는 안으로 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우린 빨리 이일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먼저였기에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겼다.

우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킨 후 이불속에 누워있는 유찬의 시신을 시트커버를 벗겨내

유찬의 시신을 감쌌다.

현일이는 머리쪽을 들었고, 나는 왼쪽 다리를, 태경이는 오른쪽 다리를 잡고 1층으로 내려왔다.

"우웩~! 빨리치워!"

민철과 종일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씨발. 그럼 니네 들이 옮겨! 우린 코 없는 줄 알아!"

현일이 짜증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지석이는 계속 하나님만 중얼거리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은 입과 코를 막은 채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알았다. 이놈들아!"

현일이 소리치며 지하실로 내려왔다. 조심스레 시신을 내려놓았다.

우린 지석의 시신을 꼼꼼하게 묶은 뒤 한참동안을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아무말 하지 않고 그저 유찬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선 어제까지 술만 마셔대기만 하는 유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비록 이렇게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그의 가슴만은 따뜻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핏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유찬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태경과 현일이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서로 아무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어제 밤에는 죽은 유찬이가 옆방에 누워 있다는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려 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내 눈앞에 누워있는데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아.

그저 불쌍하다. 그동안 너무 냉정하게 대해줬던 일이 기억이 나 후회 스러웠어."

현일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말야... 방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겁이 났었는데....

지금은 겁 같은건 나지 않아. 지금 내 눈앞에 누워있는게 유찬이의 시신인지 이불뭉치인지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내 뼛속 안까지 들어오는 듯 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무슨일이 생길 듯한 느낌을 받은 나는 1층 위로 재빨리 올라갔다.

현일이와 태경이도 내 뒤를 따랐다.

"얘들아..."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우리들을 보고 민철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석이가.... 지석이가.... 이상해...."

민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린 지석이의 곁으로 달려갔다.

"지석이 이녀석 왜 이래?"

태경이가 지석을 살펴보며 소리쳤다.

지석은 눈이 풀리고 얼굴은 창백했다. 한눈에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은걸 알수 있었다.

지석의 몸은 축 쳐져 민철의 품안에서 늘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하니님을 찾더니 조금전부터 이래..."

재훈이가 두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들 지석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었다.

"아까부터 민철이가 지석이 옆에 계속 있었잖아. 지석이가 왜 이러는지 민철이가 더 잘 알거 아냐."

종일이 민철을 보며 소리쳤다.

"난 그저 기운내라고 했을 뿐이야!"

"그말 하는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지석이 옆에 있었던거냐구!"

"넌 친구 위로할 때 그냥 한마디만 하고 마냐!"

"그래. 난 그냥 한마디 밖에 안한다."

"내가 보기엔 니가 지석이에게 겁을 줘서 이렇게 된거 같은데!"

"뭐라고! 이 자식이! 니가 짭새면 다냐? 졸라 짜증나는 새끼네."

"씨발. 니가 더 짜증나 조폭새꺄!"

"그리고 내가 무슨 겁을 줬다는 거냐? 씨발놈아! 그럼 넌 유찬이가 너에게 시비거니깐

일부러 유찬이를 죽인거 아냐!"

"야! 너 말이면 단 줄알아? 지금 이 상황에서 술먹다 뻣은 유찬이 얘기는 왜 나오는 건데?"

"얘들아! 그만해!"

옆에 있던 재훈이 글썽이는 눈동자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지석이가 죽은거 같아...."

우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미세하게 남아 심장이 뛰고 있었는데

지금은 멈춰버렸다. 그의 몸은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지환, 경선, 태경, 재훈, 현일은 아무말 없이 종일이와 민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운 눈빛을 하고 있었고, 낯빛이 창백했다.

"다! 너희들 때문이야! 원래 심장이 약했던 지석이가 너희들 싸우는 소리에 놀라서 그런거야!"

재훈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린 아무말 없이 한참도안을 서로를 주시하며 불안에 떨었다.

"지석이도 떠나버렸어."

한참의 침묵을 태경이가 깼다. 모두들 그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지석이도 유찬의 옆에 눕혀야 했다.

나는 아무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가 그의 방에서 이불과 침대 시트를 들고 내려왔다.

다들 입을 다문채 지석이르 유찬이 옆 자리에 눕혔다.

우리는 점심을 굶은 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말 없이 그저 두려움을 떠는 친구도 있었다.

"저녁 먹을래? 그래도 먹고 살아야지...."

창밖은 아직까지 굵은 빗방울이 요동치고 있었다.

벽란로 위에 걸린 디지털 시계는 오후 6시 2분을 가르치고 있었다.

태경은 조용히 주방 쪽으로 옮긴 뒤 분주히 저녁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린 아무도 태경이를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 난 뒤 아무것도 입을 대지 못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태경은 소소한 저녁상을 차려놓고 우리들을 불렀다.

우리 모두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언제까지 올지 몰라. 그리고 식량도 별로 없어. 있을 때 많이 먹어둬."

재훈이 친구들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음식을 만든 태경이 역시 잘 먹지 못했다.

"술이라도 한잔 할래?"

태경이가 어색한 침묵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지환만 빼고 모두 태경의 말에 동의한뒤 술 진열장이 있는 곳으로 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난 먹던 음식들을 치우며 지환에게 말을 걸었다.

"왠지 술마실 기분이 안난다."

"나도 그래."

지환도 나를 도와 식탁을 정리하며 대화를 했다.

"지석이가 왜 죽은거 같아?"

"아마. 심장발작 일 꺼야. 지석이가 심장이 많이 안 좋잖아. 난 재훈이 말에 동감해.

종일이와 민철이가 큰 소리로 싸우는 바람에 그렇지 안아도 유찬이의 죽음 때문에 몸이 많이 불편한

지석이에게 쇼크를 준거 같아."

지환이가 조리있게 자신을 생각을 말한적은 거의 드문 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술 진열대로 갔던 경선이가 한 손에 포도주를 병째 들고오며 대답했다.

"저긴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라며 주방 식탁위를 걸터 앉으며 잔도 없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유찬이 새끼는 예전부터 술에 절어 살다가 언젠가는 술 때문에 죽을꺼라 짐작했어.

그래서 그 자식 죽을 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석이는..."

그때 지환이 경선이의 말허리를 자리며 말했다.

"지석이도 지석이대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몸이 안좋다는 걸 알면서 술을 적당히 마셔야지

다들 건강한 친구들과 지지않고 마시니 당연히 작은 쇼크에도 저렇게 되어버렸지."

지환은 지석이가 평소에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폭주를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말을 들으니 그런거 같기도 한거같다."

경선이가 지환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난 술은 많이 안마시기로 했어.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간이 안좋아지더라고.

이젠 건강 생각도 해야지...."

지환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매만지며 말했다.

경선이도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포도주를 식탁 위로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거 같아."

"무슨 소리야?"

내가 경선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경선이는 실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이 붉어진걸 보니 취기가 올라오는 듯 했다.

"경선아, 상수야. 올라가서 좀 쉬자."

지환이가 경선이의 어깨위에 손은 얹으며 말했다.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짓고 방에 올라갔다.

 

 

 



2003년 7월 2일 수요일 D+9 (8명) 사망자 : 현유찬, 이지석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았다.

이른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와 냉장고에서 생수 한명을 꺼내

유리 잔 가득 따라 마셨다.

생수를 두잔 가까이 마셔도 잠이 깨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고 온 몸은 축쳐져 칙칙했다.

아직까지 아무도 눈을 뜨지 안은 듯 별장 전체는 조용했다.

난 일단 일기예보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

"지지직---. 찌----익."

TV를 켜자마자 TV가 잡음으로 가득했다.

비록 오래된 TV이긴 해도 화질이 좋고 깨끗하게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TV가 왜 갑자기 이럴까하며 TV뒤를 살며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TV가 오래되다 보니 TV와 안테나가 연결 되는 부분이 심하게 타, 탄내가 진동했다.

구식이라 그런지 접선에 문제가 있음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내겐 전자제품같은 것을 고치는 손재주가 없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옆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 역시 잡음이 심해 도저히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라디오의 잡음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짜증을 가라앉기 위해 라디오를 끄고 쇼파에 몸을 기대에 잠깐 눈을 부쳤다.

한참 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치는 것을 느끼고 무거운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현일이가 서있었다.

"왜?"

난 눈을 부비적 거리며 덜깬 잠을 깨려 노력했다.

"민철이랑, 종일이가 심하게 싸워."

"왜 또 그래?"

"왜 그러겠냐? 지석이 때문이지."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왜 자꾸 시끄럽게 그러는지 모르겠네."

"나도 잘 모르겠다."

현일은 한 숨을 쉬며 내 앞에 있는 쇼파에 걸터 앉았다.

"근데, 왜 이리 조용하냐? 싸운다면서? 왜 싸우는 소리가 안들리지?"

"너 잠을 깊게 잔 모양이구나. 아까 까지 크게 싸우다가 이제야 겨우 조용해진거야."

"그랬구나."

나는 다시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순간 종일이 급하게 2층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경선이가 죽었어!"

"뭐? 경선이가 왜?"

내가 소리쳤다.

"일단 올라와봐."

조급한 마음으로 나와 현일은 종일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경선이의 방 문에 걸려있는 방패에는 '6번 과부집 원경선'이라는 글이 써져있었다.

태경이와 지환이, 민철이, 재훈이가 방 밖에서 어슬렁 거리며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왜 그래?"
현일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약을 먹었나봐.... 왜.... 왜.... 다들 죽는거지?"

재훈이 두려운 듯 몸을 떨며 눈에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자기 방에서 약을 먹고 죽었나봐."

태경이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약을 먹어?"

나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태경이에게 재 확인을 했다.

태경이의 대답은 같았다.

"왜 약을 먹은거지? 경선이가 약을 먹을만 한 이유가 없어. 걔가 왜 약을 먹어? 왜 죽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정말 말이 안됐다.

그는 잘나가는 벤처 사업가였다.

돈도 많이 벌었고, 처, 자식들도 모두 건강했다.

그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떤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분명했다.

어제 그는 건강을 생각한다며 술을 마시지 안는다는 지환이의 말을 듣고 바로 자신이 마시던 포도주를

식탁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분명히 그는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건강하게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의미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건강을 생각했는데 오늘 갑자기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유서 같은건 전혀 없고, 수면제를 많이 먹었나봐.

경선이 침대에 약병과 알약들이 나 뒹굴고 있는걸로 봐서 약먹은게 틀림없어."

태경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약을 먹은 후 손에서 미끄러 졌나봐, 약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알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태경이의 옆에 있던 지환이 말했다.

"유서도 없다고?"

나는 경선이의 방을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죽어있는 경선이의 방안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안고 있었다.

"찾아보자. 분명히 있을꺼야."

나는 당당하게 경선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경선이는 침대 위에 잠을 자듯이 고요한 표정으로 누워있었고,

약 병과 알약들이 바닥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의 온쪽팔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지환이의 말대로 약을 먹고 약 병이 손에서 미끄러진

것 같았다.

난 그의 코와 입에 손을 대봤다. 숨을 쉬지 않았다.

왼쪽가슴에 귀를 가까이 대어보았다. 역시 멈춰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혹시나 유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해서 여기저기 뒤저 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말도 안돼! 왜 다들 죽는 거야? 왜 갑자기 죽는거냐고!"

재훈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고,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재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올때만 해도 건강했던 친구들이었다. 모두들 들뜬 마음에 이 별장으로 왔다.

그러나 지금은 썩어가는 시체만 벌써 세 구째다.

"왜 다들 죽는거지? 왜 죽는거야? 우리도... 먼저간 애들처럼 죽는거 아냐? 난 죽고 싶지 않아!"

재훈이 울음을 멈추고 떨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닥쳐! 시발, 그렇지 않아도 기분 드러워 죽겠는데 자꾸 짜증나게 할래?"

민철이 재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너나 조용해 씨발놈아!"

민철을 바라보며 종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눈 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건 바보같은 짓이었다.

그런다고 죽은 친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우리는 재훈이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누가 우리를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경선이도 먼저간 친구들처럼 지석이 옆자리에 눕게 되었다.

"재훈이 말처럼... 왜 갑자기 애들이 하나 둘씩 죽는거지? 처음엔 사고라 생각했지만

난 누군가가 우리들을 죽이려 하는거 같아."

현일이 입을 딱딱거리며 힙겸게 말했다.

"혹시... 그게 정말이면 우리도 곧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유찬이도... 지석이도... 경선이도....

왜 갑자기 죽었겠어. 그것도 3일만에... 한꺼번에...."

종일이 현일의 말에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 맺기도 전에 현일이 지하실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들 위로 쓰러졌다.

"너 왜그래?"

종일이 현일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축 쳐진 몸은 더 이상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핏줄이 그의 안구를 감싸고 있었고,

한참동안을 부르르 떨다 종일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현일아~!"

종일은 큰소리를 현일을 불러 보았지만 현일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흔들어도 보았지만 현일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현일아! 강현일! 일어나 임마! 장난 그만 하고 일어나란 말야! 이자식아~~!!"

축늘어진 현일의 몸을 감싸 안으며 종일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현일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우린 갑작스런 일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충혈된 눈을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 부릅뜬채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입은 쩍 벌어져 있었다.

"이 자식아! 장난 그만 하고 일어나란 말야! 내말 안 들려? 야! 이제 그만 일어나!!

강현일! 이제 그만 일어나란 말야! 제발 일어나... 제발...."

종일이 힘껏 현일의 몸을 흔들고 그의 뺨을 때려보아도 끝내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도저히 무슨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지능이 없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다른 친구들도 많이 놀란 듯 그저 말똥말똥 현일을 바라볼뿐이었다.

그 누구도 현일이 왜 쓰려졌는지, 왜 죽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악마가 있었다. 그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 내고 있는게 분명했다.

난 조심스레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의 축쳐진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강현일... 현일아...."

유찬이가 죽었어도, 지석이가 죽었어도, 경선이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많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에게 방해 받지 않고 울고만 싶었다.

점점 식어가는 현일의 몸을 감싸안으면 내 체온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랄뿐이었다.

현일은 다른 녀석들과는 달랐다. 그는 유찬이처럼 막난이 짓을 하지 않았고,

삐쩍 마른 지석이 처럼 하나님만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할 일을 찾아다녔고,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했다.

현일이도 지석이와 유찬이, 경선이처럼 그의 시신위에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 시트로 감싼 다음

그들의 옆 자리에 나란히 눕혔다.

난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현일이가 왜 죽었는지, 경선이가 왜 약을 먹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생각 하지 못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꿈속에서 웃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굵기는 몇 일전보다 얇아지긴 했지만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 감각이 없었던 나는 서둘러 시계를 찾아보았다.

오후 1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약간의 허리를 느꼈지만 몸이 천근 만근 무거워져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침대위에서 뒤척거리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괜찮니?"

민철이가 야윈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많이 힘든 기색이었다.

"뭐 좀 먹을래?"

나는 대답없이 고개만 저었지만 민철은 내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

유리잔에 가득 채운 뒤 내게 가져왔다.

"시원하게 좀 마셔."

갈증이 나던 참이라 민철이가 건네주는 쥬스를 마셨다.

"고맙다."

난 빈잔을 내밀며 민철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후 아무도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누구 때문에 얘들이 죽은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유찬, 지석, 경선, 현일이 아무말 없이 떠나버리고 나, 태경, 민철, 지환, 종일, 재훈. 이렇게 여섯명만이

어색한 침묵을 지키며 거실 구석구석에 앉아있었다.

"우리 이렇게 있지말고 밖에 한번 나가 보자."

갑자기 종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몇몇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다는 말이 없었기에 종일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나랑 같이나가자."

재훈이 자리에서 일어너 종일이의 뒤를 따랐다.

"싫으면 나오지 안아도 돼."

"아냐. 기분도 꿀꿀하고, 몸도 칙칙한데 오랜만에 비나 맞아 볼려구."

재훈은 웃으며 종일의 뒤를 따랐다.

재훈과 종일이 나간 후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민철은 술진열대에서 위스키 한병을 가지고 와 혼자 술을 마셨고, 지환은 고장난 TV를 고쳐보려고

끙끙 거렸다.

태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벽난로 앞에 버러덩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수야. 나좀 도와주라."

TV를 고치고 있던 지환이 나를 불렀다.

"안테나와 TV가 연결하고 있는 선이 탄거 같아. TV좀 잡아줘."

TV 브라운관을 내 앞으로 약간 기울렸다.

난 몸의 중심을 약간 움직여 TV를 들어 올렸다.

지환은 드라이버와 가위를 가지고 한참동안 땀을 흘리며 TV에 달라붙은 안테나 선을 연결시켰다.

"TV가 중고라서 안테나와 TV를 연결 하는 선이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TV내에서 과열이 있어서 부품 몇 개가 녹아버린거 같아."

지환은 고개를 젓더니 내가 들고 있던 TV를 원래 제자리로 들어 놓았다.

"심심할땐 TV보는게 최곤데..."

민철이 비틀거리며 TV쪽으로 향하자 자는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아냐. 지금은 됐고, 조금있다가 하자, TV를 오래들고 있었더니 팔이 다 저린다."

"그래?"

민철은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마침 그때 종일과 재훈이 밖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지환이 재빨리 그들에게 수건과 이불을 챙겨주었다.

"고맙다. 너에게 이런 자상한 면이 있었구나."

종일이 무뚝뚝한 말투로 감사의 표시를 전하자 지환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태경이는 왜 저래?"

"아까부터 누워있던데 자는거 아니었냐?"

민철이 비틀거리는 몸을 내게 의지하며 대답했다.

"저자식 또 술먹었냐?"

종일이 민철을 쏘아보며 말했다.

민철 역시 종일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씨발! 짭새가 저렇게 술만 처먹고 다니도 되는거냐?"

종일은 민철이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민철이 역시 종일이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갑자기 지환이의 비명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경이. 이 자식 일어날 생각을 안해."

지환이가 소리치자 우리 모두 태경이에게 다가갔다.

"태경아! 태경아!"

지환은 태경을 부둥켜 안으며 소리쳤다. 종일은 재빨리 그의 심장박동과 맥박을 채크했다.

"죽진 않았어. 열이 상당히 심해. 고열로 정신을 잃은거 같아. 누구 해열제 같은거 없냐?"

"나에게 있어."

"그것 빨리 가지고 와."

난 부축해 있던 민철을 쇼파에 내려놓고 2층에서 상비약을 가지고 내려왔다.

내가 위에 갔다 오는 사이 태경은 알몸 상태였고, 지환과 종일, 재환이 얼음과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으며

열을 식히고 있었다.

"어떤게 해열제냐?"

여러 가지 약들 중에 해열제가 어느것인지 찾지 못한 종일이 다급하게 날 불렀다.

"니가 찾아봐."

난 작은 알약을 하나 꺼내들었다.

지환은 빠른 걸음으로 물 한컵을 떠온 뒤 태경에게 해열제를 먹였다.

지환은 자신과 제일 친한 태경의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연신 '태경아~ 태경아~'만 되풀이 했다.

몇 시간이 지나자 태경이의 몸의 열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철은 쇼파에 엎어져 자고 있었고, 우린 모두 기진 맥진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그때 재훈이가 심하게 기침을 하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자식은 또 왜 이래?"

거실 바닥에 쓰러진 재훈을 바라보며 종일이 소리쳤다.

난 재훈이의 이마와 온몸을 만져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온몸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 비가 많이 맞은 상태에서 얼음을 몇 시간씩 들고 있다가 보니..."

내 말을 중간에 종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훈에게 다가가 재훈의 상태를 확인했다.

"멍청한 놈!...."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재훈을 바라보며 종일이 속삭였다.

나는 차가워진 재훈의 몸에 열이 날 수 있도록 2층에서 이불 한 꾸러미를 가지고 내려와 재훈이의 몸위에

덮어 둔 뒤 지환과 함께 태경을 쇼파위에 민철과 나란히 눕혔다.

그리고 벽란로 속에 장작 몇 개를 넣고 불을 붙혔다.

재훈이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딱딱 떨더니 바로 생명의 끈을 내려 놓아버렸다.

우린 울 기운 조차 놀랄 기색조차 없었다.

민철을 술에 취해 쓰러져 있고, 태경은 고열로 쓰러져 있고, 지환은 태경이 간호하느라 정신 없었고,

종일은 넑이 나간 듯 천장만 보고 있었다. 나역시 태경의 간호에 지쳐있었다.

재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이상황에서 재훈의 죽음을 애도할 만큼 우리들의 정신상태가 좋지 못했다.

우린 지금 아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재훈이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그 자리에 쓰러져 눕고 싶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조차 모르겠고, 창밖에는 빗살이 유리창에 부디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중간 중간에 장작이 타는 소리만 탁탁 날뿐 우리의 숨소리조차 조용하게 느껴졌다.

우린 애써 기운을 내 다른 친구들이 누워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 현일이의 옆자리에 눕혔다.

"뭔가... 이상해... 정말... 누군가가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우릴 여기로 오게 한거 같아."

난 아무말 없이 종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당당하고 위엄있었던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우리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몇일 사이에 친구들이 이렇게 죽지 않았을 꺼야.

유찬이 그놈은 술때문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지석이가 우리 싸우는 것 땜에 쇼크를 받아서 그렇게

됐다는게 도저히 이해가 안돼.

그 녀석이 아무리 심장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민철이와 내가 그렇게 큰 소리를 치진 않았어.

서로 감정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해... 뭔가가 있는게 분명해."

난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은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냥 해본 말이니깐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그러고선 바로 위로 올라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지환은 태경이를 2층으로 옮긴 뒤였고, 종일이도 2층으로 올라갔다.

난 약간의 허기를 느껴 주방에서 복숭아 통조림을 하나 까먹은 뒤 민철을 부축해 그의 방으로 옮겼다.


 

 


2003년 7월 3일 목요일 D+10 (5명) 사망자 : 현유찬, 이지석, 원경선, 강현일, 최재훈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난 주방에서 옥수수 통조림과 쥬스한잔, 크래커 과자 하나를 가지고

민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민철은 침대 위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고 있다 내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자 약간 주춤 거렸다.

난 아무렇지 않은 듯 민철 옆에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괜찮냐?"

민철은 부스스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웃었다.

"응. 괜찮아. 고맙다."

"먹을게 이런거 밖에 없더라."

"그래도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재훈이..."

난 우물 쭈물 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알고있어. 아침에 태경이가 와서 말해주더라."

민철은 애써 나에게 밝은 모습을 보였다.

"그랬구나. 태경인 괜찮아 보였니?"

난 진심으로 태경이를 걱정되어 물었다.

"괜찮은거 같았어."

하지만 민철은 나 뿐만이 아닌 모든 친구들을 경계하는 듯 했다.

"다행이구나."

사실 나도 모두를 경계하고,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근데, 종일이가 이상해."

"종일이가? 왜?"

나는 뜻밖의 얘기를 꺼내는 민철을 바라보며 눈이 동그래 졌다.

"방안에서 나올 생각을 안한데."

"..... 많이 놀라서 그럴꺼야. 자신과 제일 친한 현일이가 죽고, 거기다가 어이없이 재훈이 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

종일이 역시 다른 친구들을 계계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의 만남을 꺼려하는게 분명했다.

"니가 왠일이야? 그 녀석 걱정을 다하고? 맨날 티격태격 하더니."

나는 이상하다는 듯 민철을 바라보았다. 민철은 경찰이었고, 종일은 조폭이었다.

조폭과 경찰을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였다.

"우린 서로를 보면 서로를 못잡아 먹는 사이이긴 하지만 우린 친구야. 친구라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그 녀석은 내 관할 구역에서 사고 치지 않고, 난 그 댓가로 그 녀석을 잡으러 다니지 않았어.

그 녀석 조무래기만 집어 넣을 뿐이었지. 너도 알고 있지만 종일이 중간보스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종일이를 집어 넣기만 하면 승진은 따놓은 단상이긴 하지만 난 그렇게 치사하게 승진하고 싶지 않아.

우린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이 되어 버렸지만 우린 친구라는게 변하지 않아.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그런데 난 나도 모르게 너희들을 보면 경계를 하게 되.

너희들 중에 먼저간 친구들을 죽였을 거란 생각이 들어. 종일이 역시 그럴꺼야.

우리 같이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느낌만으로 알 수 있거든.

그게 확실한지 아닌지는 나도 사실 모르겠어. 그냥 겉으로 보기엔 살인이라 할 수 없거든.

하지만 난... 아직까지 말은 안했지만 모두 조작된 살인이라 생각해.

유찬이는 죽을 때 얼굴이 까매졌고, 입에 거품을 물었는데... 그건 청산가리를 이용한 살인이야.

자세한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내 말이 맞을 꺼야.

그리고 지석이는 심장발작이라는게 분명해. 하지만 누군가 그의 약점을 잡아서 그를 협박했을꺼야.

우리가 큰 소리로 싸워서 그랬다는건 말도 안돼. 분명 누군가가 그의 약점을 노렸어.

그리고 경선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약 먹을 이유를 모르겠어.

경선이가 자살한다는 건 말도 안돼.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화목해. 죽을 이유가 없지.

그건 누가 일부러 약을 먹인거야. 그래서 자살로 위장한거지.

그런데 유찬이는 어떻게 죽었는지 잘 모르겠어. 재훈이는 예전부터 저혈압에 저체온증이 있었어.

비를 많이 맞고 와서 차가운 얼음과 물을 만졌으니 견뎌 낼수 없었을 꺼야.

누군가 그걸 알아냈을꺼야."

"으---악!! 으---악!"

민철이 한참을 진지하게 얘기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린 서둘러 밖으로 나와 두리번 거렸다.

그때 종일이도 그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종일이 야윈 얼굴로 우리를 보며 소리쳤다.

"우린 아냐!"

민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기야!"

내가 옆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왜 그래?"

내가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태경이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지마! 제발... 가까이 오지마... 오지마..."

"왜 그래?"

민철이 조용히 물었다.

"지환이가 죽었어."

"왜?"

"나도 모르겠어. 으~~ 악~~!!"

태경은 울부 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아물 말을 하지 못했다.

태경은 가슴에 묻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을 흐느끼다가 침대에 반듯히 눕혔다.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고마웠었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거들어 주려했지만 태경은 우리의 손길을 거부하며 혼자서 아무말 없이 지환이를 지하실로 옮겼다.

부모님 없이 외 할아버지 밑에서 지내던 태경은 언제나 외톨이였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얼마 안되 할아버지께서 오랜 지병인 노환으로 돌아가신 후 그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건 지환이 였다.

그때부터 지환이는 알게 모르게 태경이의 뒤를 봐주며 도와주었다.

태경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지환이의 시신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다 그 누구의 부축도 위로도 거부한채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하루종일 우린 태경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태경이가 방안으로 들어 가자 마자 종일이 역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민철과 어색한 대화를 몇 분정도 나눈 뒤 내 방으로 와 버렸다.

하루 종일 똑같은 뉴스만 하는 TV만 보다 잠이 들었다.

 

 



2003년 7월 4일 금요일 D+11 (4명) 사망자 : 유찬, 지석, 경선, 현일, 재훈, 지환

이른 새벽부터 빗 줄기가 조금씩 줄어 들기 시작했다.

난 눅눅해진 실내를 약간 건조하게 하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짚혔다.

몇 일간 비가 계속 오다 보니 빨래들이 잘 안 말라 빨래들도 말림 겸 짚힌 불 주위에 어느새

종일, 태경, 민철이 모여 앉아있었다.

"이래서 영국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일부러 일광욕을 하기 위해 정원이나 공원에 누워있는 거구나."

종일이 탁탁 소리를 내서 타는 불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태경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우릴 죽이려 하는 것 같아."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린 속직히 태경을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초대한건 바로 태경이었고, 어제 지환이가 죽을 때 아무도 손 대지 못하게 한것도 마음에 걸렸다.

"난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우리 친구들을 죽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을꺼야."

태경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괜히 너희들을 초대한거 같아. 그래서 친구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는거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내가 태경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태경이 본인의 입에서 나오자 왠지 움찔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종일이 태경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태경을 위로했다.

종일이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아까와는 눈빛이 달랐다.

살인자는 분명 태경이가 맞는거 같긴 한데 스스로가 그런말을 하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사실 나도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런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어.

정희가 죽고 난 뒤 서로의 사이가 많이 어색해 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친구였어.

진짜 친구! 태경이 말이 옳은거 같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들이 아닌 누군가가 있는게 분명해."

태경이가 장작 대 여섯개를 불꽃 속으로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종일이와 민철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태경이가 그들을 죽인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을 텐데 왜 아무도 그런말을 하지 않는 건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민철의 말에 동의를 했지만 내 의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민철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 입을 꽉 다물었고, 종일은 아까와 다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태경이가 넣은 장작에서 불똥이 퉈더니 내 오른쪽 다리위에 떨어져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물좀 가지고와! 불똥이 튄거 같아."

종일이 소리쳤다. 그때 난 딴 생각을 하고 있어 불똥인 튄 줄 모르고 있었다.

민철은 물을 가지고 와서 내 다리위에 뿌렸다. 다행히 큰 상처는 난거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바지가 조금 타버려 바지 사이로 나의 앙상하고 휘어진 다리가 보였다.

세 번의 대 수술을 했지만 정상인 처럼 걷지는 못했다.

"화상입은거 같아."

민철이 부를거리는 내 다리를 보며 소리쳤다.

"괜찮아. 민철아 내 가방에 보면 약상자 좀 가져다 줄래?"

그때서야 약간의 통증이 느끼기 시작했다. 다리 절반이 뜨거운 불에 데여 물집도 생기고 살이 타버리기도

했지만 난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난 이보다 더한 고통도 참아 왔기에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철이 서툰 솜씨로 내 다리에 타서 달라 붙어버린 바지의 조각을 핀셋으로 하나 둘 때어 낸 후 과산화수소로

소독한 뒤 연고를 발라 그 위에 붕대를 가볍게 감았다.

"일단 지하실에 먼저 내려가보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넌 괜찮겠냐?"

민철이 날 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나 혼자 여기있다 죽으면 나만 손해잖아."

나는 민철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실 쪽으로 내려갔다.

"난 여기있을테니 살펴봐."

난 더 이상 그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뺀 세명은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상을 입은 내 다리에서 나는 냄새인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얘들아! 이상한 냄새 나지 않니? 꼭 타는 냄새 같은데?"

난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니 다리 익는 냄새 아니냐?"

민철이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아닌거 같아!"

종일이 코를 킁킁거리며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올라갔다.

종일이 지하실과 1층이 연결되는 문을 여는 순가 큰 불길이 종일을 덮쳤다.

"으---악!"

종일은 얼굴을 감싸며 절규했고, 태경과 민철은 서둘러 종일을 지하실 쪽으로 끌어 낸 뒤 종일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으.....윽...."

종일의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1층에 있던 불길이 갑자기 더 커지며 지하실까지 내려와 태경의 등뒤를 덮쳤다.

"아----악!! 살려줘!!"

민철은 서둘러 태경이의 둥에 붙은 불을 끄려 했지만 태경은 연신

"지환아... 지환아..."

라며 민철의 손길을 뿌리 친채 지환이의 시신위에 쓰러졌다.

"콜록... 콜록..."

종일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시작했다. 종일의 얼굴은 부글부글 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보다 창문하나 없는 지하실 안을 가득했다.

"도망쳐!"

민철이 나를 끌며 지하실 밖으로 나가는 계단으로 끌고 갔다. 문 앞까지 다다르는 순간 천장에서

크르르릉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무로 된 별장에 콘크리트로 덧 되긴 했지만 지지대가 나무이기 때문에 쉽게 타서 무너지는 것이었다.

민철은 나를 문밖으로 밀쳐내며 "도망쳐!"라고 소리질렀다.

"너는?"

"종일이가 아직 살아있어. 너 먼저 나가!"

나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며 지하실 밖으로 나와 연기가 잘 나가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밑철은 종일을 들쳐 업은 뒤에 내 뒤를 쫒아오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지하실 전체가 불길과 탁한 연기로 가득했다.

"빨리나와!"

난 조급한 마음으로 민철을 불렀다.

"가고 있어. 거의 다왔어. 너먼저 피해. 어서 빨리!"

민철이 소리를 질렀다. 난 그들을 뒤로 하고 힘겹게 달렸다.

순간 우르르르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순간 집 전체가 폭삭 내려 앉았다.

"민철아! 종일아!"

집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민철과 종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빗길 속에서 불길은 점점 사그러지고 있었다.

난 울부짖으며 다리를 질질 끌며 지하실 입구에서 민철과 종일을 찾았다.

"제발!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라!"

난 울부짖으며 지하실로 통화는 문과 무너진 별장들의 잔해들을 치우며 소리질렀다.

"죽지마! 제발 죽지마! 죽지마! 니가 죽으면 우리 누나는 어떡하란 말야! 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상미누나는

어떡하라고! 니 자식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상미누나와 애들은 니만 오길 바라고 있는데 니만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넌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나오란 말야! 숨어 있지말고 빨리나와! 어디에 있는거야!

어디 숨어 있는거야! 제발 나와! 제발 나와! 제발! 죽지마!"

불길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어디에도 민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는 무리야! 도와줄 사라을 찾아야해!"

난 오직 민철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달렸다.

다리가 비에 젖어 상처가 짖물러도, 온몸이 굳어가는 듯한 통증에도 난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제발 죽지마! 넌 살아야해! 제발! 넌 살아야해! 죽으면 안돼!"

눈물인지 빗물인지 내 눈앞을 가렸다.

 

 


2003년 7월 7일 D+14 (1명) 유찬, 지석, 경선, 현일, 지환, 태경, 민철, 종일

내가 눈을 떳을 때 눈앞이 강렬한 빛 때문에 눈뜨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다.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온몸이 욱씬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손가락 하나라고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그 목소리를 듣고 다시 잠이 들었다.








2004년 6월 11일 금요일


드디어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복안(復顔) 전문요원이 조형사와 강형사의 안내를 받으며 강력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화재로 인해 유실이 많았지만 불길이 크게 번지지 않아 큰 유실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단 사망자 이름을 호명하겠습니다. 현유찬, 이지석, 박태경, 최재훈, 원경선, 김지환, 정종일, 강현일.

이상 총 8명입니다.

박태경, 정종일, 강민철씨는 화상을 입어 유체가 크게 손실되어긴 했지만 다른 유체들은 큰 손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민철씨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을 한 후 조형사에게 뭐라 몇 마디를 한 후 밖으로 나가버렸다.

"세상에...."

갑자기 상미누나 현기증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다른 친구들의 마누라, 누님들은 서로들 쑥덕 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민철이의 시신만 못 찾았다니....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그토록 찾을 땐 없었던 그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 머릿속은 민철이의 생각뿐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건가? 아니면 죽었는가가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자꾸 한숨만 나왔다. 쓰러진 상미누나는 뒷전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때 조형사가 조용한 걸음으로 나 앞으로 다가 왔다.

"김상수씨 같이 좀 가주시겠습니까?"

그는 예전과 다른 퉁명스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슨일이죠?"

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그는 아무말 없이 나를 끌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취조실 안으로 들어가려 할때 강형사가 강력반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안내했다.

상미누나는 비틀 거리는 몸을 추스르지 못한채 강형사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김상수씨를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조형사가 갑자기 내 손에 수갑을 채우며 위협감 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신이 더 잘 아실텐데요. 김상수씨. 이제 사실을 털어 놓으시죠."

나는 아무말을 못했다.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침착하기 위해 심호흡을 쉼없이 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왜 아무 죄없는 저를 살인자로 내 모는 것입니까?"

"김상수씨. 당신이 정말 그 이유를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모르니깐 이렇게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어~ 휴..... 김상수씨."

조형사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난 그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난 온유한 표정을 지으려 최대한 노력을 했고

이를 악물며 침착하려 애를 썼다.

절대로 내 마음속에 있는 악마가 내 표정밖으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강민철씨 아시죠?"

"네."

"어떻게 아십니까?"

"저의 매형입니다."

"그리고요?"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럼 죽은 현유찬, 이지석, 원경선, 김지환, 강현일, 정종일, 최재훈, 박태경씨도 아시죠?"

"당연하거 아닙니까?"

"그럼 그들을 왜 죽이셨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왜 절 살인자로 내모는 것입니까!"

"저희는 이미 다 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을텐데요."

강렬한 그의 눈빛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강민철씨께서 직접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이걸로 충분하시겠습니까?"

"강민철은 죽었어! 어떻게 죽은 사람이 증언을 한단 말야! 거짓말 하지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민철이 증언을해? 그럼 민철이가 살아있다는 거야? 왜? 어떻게? 그는 분명히 죽었어.

절대 살아 있을 리가 없어. 내가 분명히 봤어. 내가 직접 그가 죽은걸 봤어! 살아 있을 리가 없단 말야!

내 머릿속과 내 가슴속이 갑자기 요동 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실수를 했나 하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날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난 눈을 부릅뜨로 숨을 고르기 위해 애를 썼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강민철씨는 살아 있습니다. 화상을 크게 입었긴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그가 직접 당신이 살인자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을 전부 죽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자가

바로 김상수씨 당신입니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 뒤에 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이 내 목 가까이 까지 들이밀었다.

"훗! 장난하지마! 그럼 내 다리는 어떻게 된거야? 내 다리는? 내 다리는 어떻게 설명할껀데?"

"자기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지 않기위해 그러셨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내다리를 자르냐!"

"그래야 당신이 의심을 안받거든요. 애써 친구들을 찾는 척해야 당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다른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줄수 있다는 것 쯤은 알고 계시겠죠? 일부러 저희들에게 별장위치를 모른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돌려 말하지 않아도 우린 이미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난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 뇌가 멈춰버린 듯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취조실 안은 출입구 하나밖에 없었으면 이 밖은 강력계 사무실이

었다.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었고, 도망을 가더라도 내 의족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난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절대 실수같은건 없다고 생각했다. 유찬의 술병에 청산가리를 넣었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민철이가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 후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우쭐해진 마음으로 다른 친구들을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었다.

지석이에게 '니가 병원에 불을 질렀다는거 알아. 그건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너 때문에 세명이 죽었어. 난 이미

알고 있었어. 넌 살인자야. 니가 정희와 재훈이네 부모님을 죽였어.' 라고 몰래 속삭였을 때도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경선이에게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인 후 자살로 위장해도 아무도 몰랐다.

내가 미리 준비해둔 상비약 덕분에 난 손쉽게 그들을 죽음으로 몰릴 수 있었다.

현일은 서서히 죽을 수 있게 만든 나의 독약 덕분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었다.

그가 갑자기 쓰러졌기에 그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민철이도 말했듯이 현일이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재훈이에게도 약을 먹였다. 원래 태경이를 먼저 죽이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난 그가 고혈압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약이 태경이를 죽음으로 내 몰릴 수 있을 만큼의 양이 아니었기에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재훈은 확실히 죽음으로 내 몰았다. 다들 재훈이 어의 없이 죽은 줄 알겠지만

그건 내가 미리 준비해둔 함정이었다. 재훈이 저체온증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는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고

그는 몸은 겉으로 봐도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그래서 약발이 먹힐까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약발이 먹혔다.

내가 친구들에게 먹인 약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건 현일이를 죽일 때 먹일 약. 태경이

를 죽일 때 먹일 약. 그런식으로 약을 먹였다. 지환이도 손쉽게 약을 먹였다. 당연히 수면제를 먹였다.

약들은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고 지냈던 퇴직한 약품회사 직원에게 거금을 주고 산것이었다.

그는 퇴직하기전 상당한 약품들을 빼돌려 싼 값에 팔아 넘겼다. 결국 꼬리가 잡혀 퇴직을 당했지만

그의 수중에는 아직도 많은 양의 약품들이 가득했다. 그의 해박한 약학 지식덕분에 난 친구들의 증상만을

가지고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일부러 벽란로에 장작을 많이 넣어 불길을 크게 만든 후 목조건물을 완전히 태운다는 목적을 가지

고 실행에 옮겼지만 결국 민철이가 살아 남았다.

까맣게 타버린 종일이의 품속에 그를 봤을 때 분명히 죽어 있었다.

그의 머리는 까맣게 타버려 차마 눈떠 보기 힘들만큼 참혹했을 정도였다.

민철이 종일이를 살리기 위해 그를 밖으로 끌고 나오려던 중 건물이 내려앉아 그 밑에 깔려 죽은게 분명했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 내가 보기엔 그는 분명히 죽은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건 절대 말이 안됐다. 그는 분명 죽었다. 그는 까맣게 타버렸고, 무너진 건물속에

파 뭍혔다.

"근데 민철이가 어떻게 살아났죠?"

"종일씨가 그를 구해 주셨다고 말씀하셨죠. 불길속에서 자신의 몸을 감싸며 자신의 녹아 내리는 살을 보고도

그는 민철씨가 살아서 자신들의 죽음을 알려달라고 애원하셨답니다.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잠시 의식을 잃었긴

했어도 민철씨는 온 힘을 다해 산아래까지 무사히 내려오셨죠."

"그럼 종일이도 내가 그들을 죽였다는 거 알고 있는 말씀이십니까?"

"태경씨, 종일씨, 민철씨 이렇게 셋은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김상수씨께선 자신의 죄를 시인하시는 것

입니까?"

난 아무말 없이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의 실수였다. 절대 실수는 있지 말아야 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은 정희를 보며 난 몇 번이고 이를 악물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가 불길속에서 살려달라 애원할 때 그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내가 불길속으로 달려 가려 하자 그들은 나를 말렸다.

모두들 겁쟁이었고, 모두들 비겁자였다. 그런 놈들이 내 친구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죽어도 마땅했다. 나의 천사, 나의 사랑을 죽음으로 내 몰린 그들은 죽어도 마땅했다.

내가 비굴함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질질끄는 다리를 감싸안으며 난 참고 또 참았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난 참고 또 참았다.

상미누나의 남편이든, 친구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나의 전부를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살인자였다. 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난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목소리의 정희를 생각했다.

나도 곧 그녀를 따라가리라 다짐했다.

조형사는 부지런히 노트북에 취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잠시만 앉아 있으라며 문을 잠궈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난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주머니에서 꺼내 내 목가까이 가져갔다.

싸늘한 칼날이 내 목 가까이에 다가오자 두려움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죽음이란게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내가 실수했다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강민철만 없었더라면 난 살수 있었을텐데...

난 후회했다. 자신이 왜 그때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후회를 했다.

있는 힘꺼 나이프를 내 목안으로 밀어넣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도 죽어갈 때 나와 같았을까? 내가 왜 이런 어리석을 짓을 했을까?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목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의식은 점점 흩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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